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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독하기 2024.05.09. (목)

엄동설한 한 세무서 직원 부인 체납정리 '자원봉사'


아무도 예측 못한 署내 3위, 서장은 특별격려 '보상'

 

"저 색시 오늘 또 왔네?"

"지극정성이다. 참말로."

구내식당 주인과 종업원이 저쪽 한켠에 앉아있는 한 젊은 여인을 보면서 주고받는 말이다. 잘해야 20대 중반쯤 돼 보이는 그 여인은 업고온 간난아이를 내려 젖병을 입에 물리고 있다. 잠시후 한 세무서 직원이 오더니 그 여인이 건네준 서류봉투를 들고 총총걸음으로 사무실로 사라졌다. 내막을 잘못 알고 보면 흡사 뭐 검은 거래나 있는 것처럼 보이기에 딱 좋은 모습이다.

그러나 그 장면은 한 세무서 직원과 그 아내의 애틋한 상봉이다. 그 여인이 전해 준 서류속에는 구청·법원에서 발급받은 세금체납자들의 부동산관련 서류 등이 들어 있다. 그 여인은 20여일전부터 이삼일에 한번꼴로 세무서 구내식당을 찾았다. 그때마다 어김없이 서류봉투는 남편한테 전달됐고, 아기에게 젖병물리는 것까지 판에 박은 듯 똑같은 반복이다. 바로 남편의 일을 돕기 위해 엄동설한 추위도 아랑곳하지 않고 아내가 발벗고 나선 것이다.

80년대 초반 어느해 12월. 일선 세무서에는 연도말을 앞두고 체납정리작업이 강도높게 진행됐다. 항상 체납정리업무에는 '강력한'이라는 강조어가 따라붙는게 보통이지만 그해는 예전보다 훨씬 강도가 셌다. 그해 9월 정기국회에서 국세 체납액수가 사상 처음으로 조(兆)단위를 넘었다는 질책이 나온 데다 세수마저 원만하지 못했던 게 원인이었다.

-체납정리 우수관서·직원은 관리자와 직원 모두 인사에 특단의 우대를 할 것이다. 그러나 부진한 관서는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문책이 있을 것이다.-

국세청이 체납정리를 독려하기 위해 관하에 내려보낸 경고문 요지다. 국세청은 그리고 '경고'의 뜻으로 3/4분기 실적을 토대로 실적부진자 20여명을 오지세무서로 전격 발령했다. 그러니 일선 현장의 체납정리 분위기는 뜨거울 수밖에.
               
           

           

 


영등포세무서 부가세과(8급) 직원 A씨. 폐품처리장이 가득한 양남동을 1년남짓 담당해 왔는데 납세자 분포가 워낙 열악해 근무기간동안 체납정리부문만큼은 항상 꼴찌를 면치 못했다. 요령도 없고 약삭빠르지도 못해 매번 남들이 기피하는 지역을 도맡다시피 한 것인데, 그해 8월에 있었던 '담당지역 조정'에서도 역시 형편없는 곳을 맡게 됐다. 중기사무실 밀집지역이 담당구역으로 떨어진 것인데, 이쪽 동네의 세무환경은 너무 말이 아니어서 과장이나 계장, 심지어 세무서장까지도 아예 내놓다시피 하고 있는 곳이다.

그런 척박한 지역을 담당구역으로 맡게 된 A씨. 보통사람 같으면 상사를 원망해 볼만도 한데 그는 마음속으로 '일복 많은 놈은 이렇다니까'라고 한번 뇌까리고는 밖으로 싫은 내색 한번 안했다. 다만 꼴찌는 지방으로 쫓긴다는데 그렇게 되면 셋방 문제에다 젖먹이 어린아이를 데리고 지방으로 옮겨 가야 할 일 등을 생각하니 까마득하기만 했다.

'하는 데까지 해보자. 앉아서 당할 수는 없지 않은가.'

이를 악문 A씨는 우선 세무서가 이미 파악해 놓고 있는 중기사업자들의 체납유형을 토대로 계획을 짜고 일을 추진했다.

그러던 어느날. 잔무를 마치고 저녁 9시가 넘어서야 집에 돌아온 A씨는 아내가 내미는 서류봉투를 받고서는 그만 말문이 탁 막혔다. 한 중기사업자의 주민등록등본과 사업장 소재 건물의 건물대장, 등기부등본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집에까지 잔무를 가져와 끙끙대는 모습을 본 아내가 어깨너머로 메모한 문제의 체납자 주소지 확인 등 정리업무를 남편 몰래 돕고 나선 것이다.

심부름센터 한번 이용해본 적 없는 A씨는 아내의 '알심'찬 도움으로 체납정리 4/4분기 실적 署내 3위라는 아무도 예측 못한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이듬해 1월 하순. A씨는 서장으로부터 점심 초대를 받는다. 짬뽕과 팔보채, 고량주 등이 서장실로 배달됐다. 특A급 접대를 받은 셈이다.

"자네, 1년만 더 고생해 줘. 그쪽(중기) 일은 이제 자네가 박사야."

서장의 목소리가 오늘은 왠지 더 따뜻한 기분으로 와 닿는다. 배석한 부가세과장도 덩달아 기분이 좋은 얼굴이다.

"이거 자네 와이프 갖다드리게."

서장이 내민 쇼핑백에는 자주색 여성오바 한세트가 들어 있다.

A씨는 그해 4월 직원정기인사때 서울청 부가세과로 전격 스카웃됐다. 그 후로 그는 상사들로부터 '쓸만한 놈'이란 애칭을 많이 들었다.

그 '쓸만한 놈'이 지금은 세무서 과장이 돼 있다.

<서채규 本紙편집주간>
seo@tax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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