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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독하기 2025.01.09. (목)

가격이 제 구실을 해야 한다

곽태원 서강대 경제학과 교수

 사회주의 경제가 패망한 가장 중요한 이유는 가격을 말살했기 때문이다. 가격의 숙청은 곧 시장의 처형이다. 가격이 기능을 하지 못하면 재화나 용역이 제자리를 찾아가지 못한다. 당연히 생산이나 공급도 헝클어지고 수요도 제대로 충족되지 못한다. 자원이 엉뚱한 곳에서 낭비되고 꼭 있어야 할 곳에는 가지 못하는 사태가 도처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희소한 자원이 이렇게 낭비되는 체제에서는 자연자원이 풍부해도 가난하게 살 수밖에 없다. 한편 가격결정권을 가진 권력층의 부패는 더 기승을 부리게 된다. 일반 서민들은 지옥같은 생활을 하면서 천국에서 산다는 고백을 강요받는다.

 

 과감하게 가격을 사면한 중국은 잠깐 사이에 G2의 반열에 오르게 됐고 동구권의 국가들도 빠른 성장을 즐기고 있다. 북한에서도 암시장 가격의 숨통을 조금 터주면 하층민들의 생활이 좀 호전되고 옥죄면 살기가 더 힘들어지는 현상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현상들을 누구보다도 지근거리에서 관찰한 우리나라의 지도자들이 가격을 핍박하고 있다. 가격은 시장에서 결정돼야 하는 것인데 가격에 대한 명령을 남발하고 있다. 최근 원가에 못 미치는 전력요금 때문에 전기가 엉뚱한 곳에서 낭비되는 수많은 사례들이 보도됐던 적이 있다. 그 뒤로 전력요금을 인상하기는 했으나 시혜적인 요금구조를 견지해 효율 개선에 큰 효과가 있을지는 의문이다. 휘발유 가격을 못살게 굴더니 이제는 정부가 주유소까지 차리겠다고 한다. 서민 보호를 목적으로 아파트 분양가격 상한제를 실시했는데 서민들은 전세난으로 고달파하고 있다. 정치인들은 등록금을 반으로 줄여서 가난한 대학생들 도와주자고 하는데 이 경우 실제로 이득을 보는 것은 대기업, 공기업들이라고 한다.

 

 가격규제의 명분으로 항상 물가안정 혹은 서민생활 안정이라는 목표가 제시된다. 하지만 몇 개 품목의 가격규제를 통해 인플레이션을 진정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또한 가격 규제의 혜택이 서민들에게 골고루 돌아가기도 어렵다. 예를 들면 휘발유 가격을 인하할 때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서민들은 별 혜택을 보지 못한다. 우리나라의 쌀값 정책은 영세농민이나 도시 근로자들에게는 도움보다 짐이 된다.

 

 정부가 가격을 좌지우지하기 시작하면 시장은 점점 더 위축될 수밖에 없다. 정부 규제로 정부의 힘만 커지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정책을 뒷받침할 재정 확보를 위해 세금이 늘어나야 하고 정작 필요한 부분에 대한 지출이 줄어드는 사태가 발생할 수도 있다. 기업들도 원가 절감이나 연구 개발을 통해 경쟁력을 높일 생각은 점점 뒷전으로 미루게 되고 정부 정책에 편승해서 쉽게 돈을 벌 궁리에 매달리게 된다. 이런 일에 서투른 기업들은 사업을 접든지 다른 시장으로 나가도록 내몰리는 경향이 나타난다. 외국인 직접투자에 악영향을 주는 것도 사실이다. 결국 서민들은 일자리 부족과 소득 저하에 시달리는 결과가 나타날 수 있다.

 

 다행스럽게도 아직 우리 경제는 매우 역동적이고 정부의 규제가 체제를 걱정할 만큼 심각하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시장경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자칭 개혁적인 정치인들이나 정책 담당자들, 그리고 국가의 장래보다는 눈 앞의 정치적 이익 계산에 바쁜 정치꾼들이 우리 경제에 미치는 해악은 이미 상당한 수준에 이르고 있다는 판단이다. 이들이 끼치는 폐해는 당장 나타나기보다 시간을 두고 나타날 가능성이 훨씬 더 크다.

 

 기업이 연구 개발에 더 많이 투자하고 꿈을 가진 젊은 기업인들, 과학자들, 공학도들이 계속적으로 공급돼야 우리 경제의 역동성이 유지될 수 있다. 외국 기업들에 의한 국내 투자도 더 활발하게 이뤄져야 한다. 이런 분위기를 만드는데 '자상하고 큰 정부'는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시장의 가격 메커니즘이 본연의 역할을 제대로 하도록 해야 한다.

 

 ※본면의 외부기고는 本紙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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