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국가부채가 국가가 정한 한도액에 도달해 더이상 부채를 발행할 수 없는 상황에 도달하자 의회와 정부가 협상해 부채 한도를 늘려 당장 급한 불은 끄되 앞으로 재정지출을 삭감해 재정건전성을 확보한다는 합의를 도출했다. 이에 대해 신용평가회사가 세부담의 증가에 대해 합의된 내용이 없다는 점을 이유로 미국의 신용등급을 한 단계 하향조정했고, 그 파급효과가 전 세계로 퍼지고 있다.
재정을 방만하게 운영하지 않고 건전한 상태로 유지하던 국가도 심각한 불황을 경험하거나 세계적인 경제위기와 같은 상황에 직면하게 되면 부채를 발행하고 적자재정을 통해 위기를 극복하게 된다. 부채를 발행할 때는 나중에 흑자를 만들어 채무를 상환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민주주의 사회에서 그렇게 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국가에서 이전에 발행한 부채를 상환하는 재원을 마련하는 방법은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는 세제 개혁을 통해 세금을 많이 징수하는 것이며, 두 번째는 재정지출을 감축해 재원을 마련하는 것이고, 세 번째는 경제 활성화를 통해 세수입 증가와 여유자금의 확보를 도모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세 가지 방법이 모두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그다지 강력한 수단이 되지 못한다.
이번 미국의 협상과정에서도 드러났다시피 세제 개혁을 통해 세금을 증가시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부채 상환 압력을 피부로 실감하지 못하는 국민들에게 부채 상환을 위해 세금을 더 납부하라고 설득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부채 상환이 국민 개개인에게 주는 혜택은 거의 눈에 띄지 않는 반면 개개인의 세부담 증가는 명확하게 드러난다. 그러므로 국가 경제 전체의 흥망에 대해 책임을 지는 대통령과는 달리 특정 지역 주민에 의해 선출된 국회의원들은 부채 상환을 위해 세금을 인상하는데 적극적으로 동참하기를 꺼리게 된다.
재정지출의 삭감은 막연하게 앞으로 재정지출을 삭감한다는 합의를 볼 때는 그 불이익이 누구에게 귀착될지 모르는 상황이므로 정치권에서 비교적 쉽게 합의를 도출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실천은 매우 어렵다. 특정한 재정 지출을 삭감하는 방안이 구체화되면 불이익을 받는 집단이 명확하게 드러나고 그들은 그들이 가진 정치력을 다해 반대하게 된다. 거의 대부분의 지출 삭감은 이러한 반대에 직면하게 되며, 실제로 재정지출 삭감을 통해 재정 상태를 개선한 사례는 많지 않다. 이번에 미국 신용평가가 하락할 때 재정지출 삭감 약속이 크게 인정을 받지 못한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인 것으로 생각된다.
마지막으로 경제의 호전을 통해 과세표준이 확대되고 그로 인해 증가된 세수입으로 부채를 상환하는 것은 모든 이들이 동의할 수 있는 방법이며, 실제로 이러한 방법이 지금까지 민주주의가 발달한 선진국의 부채 증가 속도를 완화시키는데 크게 기여한 것으로 판단된다. 이번 사태에서도 미국은 금리를 낮은 수준으로 유지해 경기를 회복시키고자 노력한다는 점을 보임으로써 문제를 완화시키고자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부채 상환에는 한계가 있다. 첫번째는 경제가 실제로 활성화돼야만 실현되는 방법이며, 두번째는 세수입이 증가해 재정에 여유가 생기더라도 정치가들은 그것을 모두 부채 상환에 사용하기보다 일부를 세부담 완화에 사용해 정치적 지지를 강화시키려는 동기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문제는 모두 개별 주민의 입장에서 볼 때 부채 상환의 이익이 거의 드러나지 않으며, 민주주의 사회에서 정치인들은 그러한 개별 주민의 의사를 반영해 의사결정을 한다는 데서 시작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이번의 미국 신용등급 하락과 그에 따른 파장은 국가 부채 상환의 보이지 않는 이익을 시장에서 명확하게 보여준 사례로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고 할 수 있다. 이 사례가 앞으로 재정건전성을 확보하기 위한 정치적 의사결정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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