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인내천(人乃天)이라고 했다. 사람이 하늘이란다. 하늘같이 존경받아야 될 존재라고 한다. 머릿속은 온통 동학교에 배운 <사람^하늘>로 가득 차 있건만, 현실은 고부군수 조병갑이 만석보를 쌓아놓고 물세(水稅)를 더 내라고 독촉한다. 1876년 강화도 조약 체결로 왜인(倭人)들이 군산항 근처에 득시글거리기 시작했고 쌀값은 폭락했다.
왕조로써 생명을 이미 잃은 조선에 대해 청나라와 러시아가 눈독을 들이기 시작한지 이미 오래전이다.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을 판이다. 그래서 보국안민(輔國安民), 제폭구민(除暴救民), 척양척왜(斥洋斥倭)의 기치를 걸고 1894년 1월 고부에서 동학교도이자 농민이고 서당에서 글을 가르치던 전봉준이 일어났다.
사건의 시작은 세금이었고 주연(主演)은 전봉준 조연은 조병갑이었지만, 실상은 일본과 청나라 그리고 러시아와 미국 등 세계 열강이었다. 한반도 곡창지대의 전라북도 고부가 동서양 각축의 시발점이 된 것이다. 1914년 사라예보에서 울린 한발의 총성으로 세계 제1차 대전이 시작됐다고는 하지만, 실상은 세르비아, 프랑스 및 독일의 민족주의의 각축이 그 주된 원인이 된 것처럼.
2. 인류 역사를 가만 들여다 보면 처음엔, '천내천(天乃天)' 시대였다. 하늘이 하늘인 시대였다. 하늘이 모든 것이었고 인간도 하늘의 뜻에 따라 살다가 죽었다. 모세나 여호수아 시대가 그러했다. 이후 '왕내천(王乃天)' 시대가 왔다. 선하고 유능한 왕이 집권을 하면 백성이 편했지만, 무능한 왕이 집권을 했을 때 그 혹독한 대가는 백성의 몫이었다. 우리네 세종이 전자였다면 후자는 임진왜란을 당한 선조였을 것이다. 서양에서는 교황이 세상 왕의 역할까지 다 하겠다고 욕심을 부리다가 1453년 콘스탄티노플의 함락으로 르네상스가 와서 인내천(人乃天) 시대가 됐다.
그러고 지금은? 여러 가지 관점이 있지만, 돈이 세상의 모든 가치기준이 되는 '금내천(金乃天)'의 시대가 아닌가 싶다. 거친 말로 표현해서 인간 그 자체보다, 돈이 모든 가치의 척도가 되는 그런 세상 속에 살고 있다. 아파트 평수를, 타고 다니는 자동차의 배기량을 인간의 됨됨이보다 우선 물어보는 것이 다 그런 것의 예가 아닌가.
돈이 돈을 만드는 법이다. 그래서 금융산업이 발달하고, 상위 소득 1% 집단이 국가 전체 부(富)나 토지의 과반수 이상을 점하는 것이다. 이들이 정치권력도 함께 갖고 있어서 감세는 기뻐하지만 증세(增稅)에는 극구 반대한다. 왜냐면 돈이 모든 것의 존재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지금이야 <1 대 99>의 사회이지만 머지 않아 <0.1 대 99.9>의 사회가 될 것이다. <20 대 80>이라고 했던 것이 바로 엊그제 일이다. 그렇다면 이게 과연 바람직한 사회인가? 진지한 고민이 필요하다. 학계에서는 이미 자본주의 이후의 시대를 논하고 있다.
3. 왜 하고 많은 고을 중 고부인가? 사실 이미 진주, 성주, 상주 등에서 고부와 유사한 형태의 운동이 있었다. 전국적으로 확대만 안 됐을 뿐이다. 고부에는 특별한 게 있었다. 여기에는 조병갑과 전봉준의 운명적인 만남 이외에도 실학과 동학의 기막힌 조우가 있었다. 학문적으로 보면 망해가는 왕조를 뒷받침했던 성리학 대신 국민들의 삶을 걱정하는 개혁적인 실학사상이 움트기 시작했고, 여기에 평등사상을 강조한 동학교의 역할이 고부 농민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줬다. 결국 역사의식을 가진 선비가 실학이라는 학문과 평등의 종교를 만나서 혁명이 됐던 것이다.
정조가 집권한 시대에는 서양에서 프랑스 대혁명(1789년)이 있었고, 조선에서는 다산 정약용 등 실학파(實學派)가 등장해서 정조의 개혁과 궤를 같이 했었다. 반계 유형원은 이미 균형재정을 역설했고 다산 정약용은 실질과세원칙을 주장했었다. 그러나 당시 수구세력의 반대로 정조나 실학파의 개혁 시도는 물거품이 됐고 그 폐해는 고스란히 그 뒤 세대를 살았던 불쌍한 조선인의 몫이었다. 조선 재건의 마지막 기회를 기득권층이 스스로 차버린 것이다. 세금이 잘못 되니 결국 일개 왕이 아닌 왕조가 거덜난 것이다. 결국 일제 36년간의 치욕을 맛보게 된다. 지금이야 공평을 얘기하지만 당시에는 양반과 천민, 왕족과 평민에 대한 차별을 극복하기 위한 테제(these)로 평등이 최고의 가치였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평등이 되고 난 뒤에 공평을 논한다.
경제적인 측면에서 보면 당시 전라도는 전국 쌀의 3분의 2이상을 생산하고 있었다. 그 무렵 세제는 전세(田稅)가 주된 세목이었던 관계로 전국 세수의 68% 이상을 담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조병갑은 그곳의 세무서장을 하고 싶었던 것이고 그의 욕심에 비례해 당시 납세자였던 서민들은 담세능력을 초과한 납세의무를 부여받았던 것이다. 반면 양반님들은 면세 혜택을 받아서 문제가 없었고.
4. 며칠 전 학회 참석차 그곳 고부의 동진강 유역을 거닐다가 탐욕스러웠던 조병갑을 만났다. 당시 가장 '물 좋은 곳'의 세무서장이었던 그였다. 심지어 익산군수로 승진 발령이 났어도 당시 '영포라인'을 통해서 고부 현감으로 40일만에 다시 돌아온 인물이다. 과거급제자 명단에도 없는 것을 보면 분명 돈을 주고 그 직을 샀을 것이다. 그러니 본전 생각이 났을 법하다. 하여 모친상 부조금 봉투를 안 돌렸다고 전봉준의 부친을 곤장으로 패서 사망케 한 자이다. 그의 얼굴에 돈이 새겨져 있었다.
또 한 무리를 만났다. 우리네 증조부세대였던 농민들이다. 오로지 하늘과 동진강 물줄기만 바라보고 평생을 살았던 그들의 애달프고 서러운 두툼한 손들을 만져 본다. 그들의 손에 쥐었던 낫과 죽창은 비록 일본군의 총에 쓰러져 갔지만, 그들의 정신은 3·1 운동, 4·19혁명, 5·18 민주화운동과 6월 항쟁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있다.
세금은 참으로 어려운 것이다. 35년 이상을 세법 책을 뒤적이며 살고 있지만, 세금에 대한 정의조차 제대로 내리기 어렵다. 그렇지만 역사상 그리고 경험측상 조세공평주의가 맞다. 지금처럼 회사 부장과 회장이 동일한 세율을 적용받는 것은 조세공평부담원칙과는 한참 거리가 있다. 세정담당자들은 읽어도 이해하기 어려운 영어책만 붙들고 있지 말고, 유형원의 반계수록과 정약용의 경세유표 책을 들고 고부의 동진강 유역을 한번 돌아보시라. 선조들의 삶 속에서 현재 어려움을 극복하는 지혜를 얻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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