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보와도 투기·탈세혐의 때만 조사했다 / 이론맞는 제도 현실수용 안되면 無用之物
세무조사관제 도입 국세공무원 자긍심 배양 / 국세청 인사 신뢰·예측가능성 전제돼야
우리나라는 가깝게는 선진국인 日本, 후발도상국인 中國 등과 경쟁을 해야 하며, 크게는 세계 여러나라와 무한경쟁을 벌여야 한다. 또한 최근 경기침체와 고유가로 인한 원자재 값의 상승 등 경제적인 어려움에 처해 있다. 이러한 때에 李建春 법무법인 태평양 고문(前 국세청장, 건교부 장관)은 "국세청은 국민들에게 사랑받는 조직이 되는 것도 좋지만, 국민들로부터 신뢰받는 조직이 돼야 한다. 국세청은 국가 조직의 최후의 보루다. 세정을 바로 세우지 않으면 나라의 기강이 안 선다"며 "안정적 세수확보에 기여하고 세계 경제속에서 경쟁력을 갖춘 국가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국세청의 역할이 크다"고 강조했다. 본지는 창간 39주년을 맞아 李建春 前 장관으로부터 이같은 상황에 어떻게 대처해 나가야 하는지 그 고견을 들어봤다.<편집자 주>
이건춘 前 국세청장은?
△'43년 공주 출생 △연세대학교 행정학과 졸업 ('66) △미 UCLA 최고위과정 수료 ('92) △제10회 행정고시 합격 ('71) △청량리·중부·을지로·남산세무서 과장('71∼'77) △중부지방국세청 부가세과장, 총무과장 ('77) △논산, 제주 세무서장 ('80∼'82) △서울지방국세청 총무과장 ('83) △개포·반포세무서장('85∼'87) △국세청 기획예산담당 과장 ('88) △국세청 재산세과 과장('89) △국세청 총무과 과장 ('90) △국세청 기술연구소 소장 ('90) △국세청 기획관리관 ('92) △국세청 재산세국장 ('93) △국세청 직세국장 ('94) △경인지방국세청장('95) △중부지방국세청장('96) △국세청 국제조세조정관 ('96) △서울지방국세청장 ('97) △국세청장 ('98) △건설교통부 장관 ('99∼2000)
▶오랫동안 국세청에서 재직하시는 동안 기억할만한 일들이 많으셨을 텐데요.
=우선 세정신문의 창간 39주년을 축하하며 애독자 여러분께 이 기회를 빌려 인사드린다. 국세청이 지난 '66년에 개청됐고, 그로부터 약 5년후인 '71년도에 국세청에 입문했는데, 여러가지 기억에 남는 일이 있다. 그중 9차에 걸친 대중세 혁신문제로 밤낮없이 일을 하고, 특히 당시 대중세 혁신을 위해 과장과 직원을 상대로 교육원에서 특강을 하던 때가 기억에 남는다.
그리고 '77년 부가세 도입때 지방청 부가세과장, '88년 여소야대때 기획예산담당관, '89년 부동산 투기가 전국적으로 횡행할 때 부동산투기특별조사반이 6개 지방청에 구성됐는데 이때 본청 재산세과장, '92년 경인청과 세무관서의 신설을 비롯한 직원증원을 할때 기획관리관, '93년 토초세 정기과세와 금융실명제 실시에 따른 금융소득종합과세를 위해 통합전산망을 구축하고 후속조치 작업을 하던 때 주무국장으로, 마지막으로 서울청장과 국세청장으로 재직시 경제적 어려움과 정권교체기, IMF 등으로 경제적 어려움에 처해 있던 상황하에서 경제 안정화를 이루고 세정개혁을 단행했던 때 등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세무조사관제 도입의 실무주역을 맡으셨는데 추진과정에서의 에피소드를 소개해 주신다면.
=당시는 '93년 문민정부가 출범했고, 추경석 청장 시절이다. 이 때는 세정혁신작업이 꽤나 많았다. 이를테면 제도나 조사 등 여러가지를 바꿨다. 특히 직원의 사기진작을 위해 남다른 노력을 기울였다. 당시 기획관리관으로 재직 중일 때인데 행정관리담당관이 세무사회장을 지냈던 林香淳씨(현 한국세무사회 고문)였다. 그 당시에는 세무조사관이란 대외적인 명칭을 쓰려면 총무처로부터 양해를 받아야 했다. 감사원에 감사관과 부감사관제가 있어 감사원의 경우도 고려해야 했었다. 20∼30년 평생을 국세청에서 봉직하다 대외적으로 주사로 끝나서야 체면이 서겠는가. 또 60세가 다 돼서 사돈을 맺을 때 그래도 세무조사관이라고 해야 좀 떳떳할 것이 아닌가. 여기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래서 당시 서장 등 관리자에게 직원들의 명함을 새겨주라고 지시했다. 당시 세무조사관제의 도입은 우리 국세공무원의 자존심(自尊心)을 한껏 배양시켜준 조치였다고 생각한다.
▶중부청, 서울청, 본청 등 3개 청의 총무과장을 역임하시고, 또 경인·중부·서울청장과 본청장을 역임하신 특이한 경력을 가지셨는데 총무과장 재직시 일어났던 일화나 재미있는 이야기를 소개해 주시지요.
=오로지 인사권자의 결심에 의해 된 것이라 생각한다. 중부청, 서울청, 본청 총무과장 모두 마찬가지지만 총무과장은 불편부당이라고나 할까, 원칙을 고수하는 일이 우선 중요하다. 특히 중립을 지켜야 하고, 본인의 처신이 중요하다. 일례로 인사때 한번도 직접 전화를 받아 본 적이 없다. 그러다보니 당시 국민학교를 다녔던 애들이 왈 "아빠, 계시는데 왜 안 계신다고 그래"라고 말하면, 얼굴이 후끈 달아오르기도 했다. 애들을 설득하는데 여간 곤란한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사람을 많이 알고 나면, 인연이 된다. 그래서 관인(官印)을 집행해야 할때 사견이 들어가기 때문에 공식적인 모임 외에 사적인 모임엔 일절 참여하지 않았다. 이는 하나의 덕목이기도 하다.
지방청 총무과장때는 주무자의 신상파악을 다 했었고, 본청 총무과장땐 5급이상 관리자의 취미와 업무능력 등 모든 정보를 다 파악하고 있었다. 그래서 인사권자가 인사를 할때 1∼3인을 대안으로 제시할 수 있었다. 이처럼 인사권자가 적재적소(適材適所)의 필요한 인사를 할 수 있도록 보좌를 철저히 했다. 인사(人事)는 사람이 하는 일이다. 사람이 바로 되지 못하면 인사를 못한다.
▶국세청 인사에는 원칙이 있어야 하고, 한번 정해진 원칙은 변함이 없어야 한다고 평소 재직 중에 이야기를 하셨는데 이에 대한 견해를 밝혀 주시지요.
=행정은 예측 가능성이 있어야 하듯, 인사도 마찬가지다. 저 사람이 일을 열심히 하니까 승진하더라 하는 인사원칙이 있어야 한다. 특히 인사의 대원칙은 매번 똑같아야 한다. 2003년에 다르고, 2004년에 또 달라서는 안된다. 결국 예측 가능성이 인사의 대원칙이다.
과거 서울시내 직원인사를 A, B, C군으로 나눠 순환인사를 했다. 그런데 그 원칙이 갑자기 바뀌면 직원들이 혼란스러워하고 신뢰하지 않는다.
요즘 李庸燮 청장이 실시하는 다면평가제라든가, 희망지 5∼6곳을 사전에 접수받는 것도 좋은 예시다. 인사는 인사권자 고유의 권한이지만, 인사권자 입장에서 모두 적재적소의 인사를 할 수는 없다. 그래도 국세청은 어느 부처보다 인사원칙이 제대로 정착된 곳이다.
국세청은 어느 분야에서 일하든 열심히 땀 흘려 일한 사람이 대접받도록 해 왔다. 인사는 결국 사람들이 볼때 '공통분모'가 있어야 한다. 일을 열심히 하지 않은 사람이 승진을 해선 안 된다는 것 역시 인사의 대원칙이다.
▶'93년 토지초과이득세 과세와 금융실명제 실시에 따라 주무국장(재산세국장)으로 어려움이 많으셨을 터인데 그 때 이야기를 해주신다면.
=그때도 국세청 직원들의 고생이 많았다. '93년 토지초과이득세 정기과세가 있었고, 이에 앞서 80년대말은 부동산 투기 광풍이 일고 있었다. 일부에선 토지공개념제도를 도입하고, 투기로 인해 얻은 차익은 100% 과세하자는 주장 역시 일고 있었다.
'93년 토초세 정기과세 당시 예정통지를 했을 때 엄청난 반발이 있었다. 토초세는 미실현 이득에 대한 과세여서, 한때 토지공개념 도입을 주장했던 일부 시민단체와 일부 학자들이 '93년도에 와서는 "뭐 이런 법을 만들어 국민을 괴롭히느냐"고 말을 바꿨다. 이는 결국 이론적으로는 맞는지 모르겠지만, 현실에는 맞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당시 과세기준은 공시지가로 했다. 그러나 공시지가는 그 기준에 객관성이 결여됐었다. 전문가도 아닌, 일용직을 고용해 조사했으니 오직 했겠는가.
일례로 도로에 인접한 대지보다 맹지(길 가운데 꽉 막혀있는 토지)가 더 비싸게 책정됐다.
그 공시지가를 기준으로 막상 과세를 하니, 세금 반발이 심했다. 그래서 관계부처 합동회의를 매일 하다시피 했다. 이를테면 감사원의 기준시가 불합리성 개선요구와 재무부는 행정처리로 하자는 주장 등이 나왔다. 당시 과세와 관련 종로는 과세하고, 관악은 과세하지 않는 등 일선의 사실판단에 맡겨선 안되도록 했다. 따라서 소급입법의 경우 국민에게 불이익을 주지 않도록 시행령을 개정해 당초 예정통지보다 훨씬 줄어든 금액으로 합리적으로 조정해 토초세의 후유증을 최소화했다.
'93.8.12자로 금융실명제가 대통령 긴급명령으로 시행됐다. 그 당시 3천만원이상 현금인출과 5천만원이상의 채권거래는 국세청에 통보하도록 돼 있었다. 그러자 모든 시장이 얼어붙었다. 결국 집행은 국세청이 하기 때문에 요원을 파견해 보니 남대문과 평화시장은 일체 거래를 중단하고 현금을 금고에 쌓아 놨었다.
이에 따라 후속대책으로 지방청에 "국세청에 통보가 와도, 투기와 탈세혐의가 있을 때만 조사한다"고 지시했다. 당시 기획예산담당관이 金井復 現 중부청장이었는데, 그에게 위에 적시한 대로 문구나 토시 하나도 바꾸지 말라고 했다. 나아가 국세청은 정상적인 상거래에 대해서는 절대 시비를 가리지 않도록 했다. 그러면서 대책회의도 자주 했고, 금융실명제의 정착을 위해 성공적인 역할 수행을 했다.
특히 그 당시 일반조사는 안했다. 즉 부동산 투기조사와 탈세혐의때만 조사를 실시했다. 금융실명제 실시와 관련해 부총리와 재무부 장관, 국세청장의 합동기자회견이 있었다. 원래 국세청장은 기자회견에 참석하지 않는 게 상례인데, 추 청장은 참석했다. 이때 국세청 직원들은 밤낮없이 토·일요일도 없이 일을 했었다. 정말 애를 많이 썼다. 이때 李柱碩 재산세과장(前 서울지방국세청장)이 애도 많이 쓰고 고생이 많았었다.
결국 여기서 얻는 교훈(敎訓)은 "아무리 좋고 이론에 맞는 제도라도 현실(現實)에 수용되지 않으면 사문화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법을 만들었으니까 우리는 법대로만 집행한다'는 식의 발상은 안된다. 제도는 반드시 실현 가능성과 현실에 적용시 어떤 문제가 발생되는가를 정확히 짚어봐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