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중앙은행 ECB의 Draghi 총재가 국제자본시장이 오래 기다리던 발언으로 각 나라들의 주가지수를 위로 끌어올린 것이 7월26일이다. 유로화가 붕괴되지 않도록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하겠다는, 의례적인 발언일 수도 있는 언급에 대해 자본시장은 이태리와 스페인의 국채를 매입하는 구체적인 조처가 바로 이어지는 것으로 기대한 것이다. Drahgi 총재가 ECB의 발권력을 동원해 두 나라 국채를 매입하고 싶어하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아직도 독일연방은행 Bundesbank의 반대는 완강하고 Drahgi는 아직 의사를 관철시키지 못하고 있다. 왜 ECB 총재는 이사회 내에서 유일한 반대자인 Bundesbank 총재 Weidmann을 무시하고 결정을 하지 못하는가? 왜 유럽의 재정위기는 해결의 실마리를 풀어내지 못하고 있는가?
ECB의 정치적 독립성과 물가안정만을 기관이 추구하는 유일한 정책목표로 두는 것은 EU조약의 130조와 127조에 각각 그 확고한 근거를 두고 있다. Bundesbank가 이러한 법적(조약적) 근거 위에서 ECB의 국채 매입은 물가안정이라는 기관 고유의 정책 목표와 관계가 없는 일로 논리를 전개하는 이상 소수의견이라고 해서 배격하기는 쉽지 않다. (중앙)은행인들의 은근한 표현과 자기통제의 달인으로 알려진 Drahgi 총재가 이사회에서 이러한 중차대한 문제를 법적인 관점에서만 보려고 하는 (Bundesbank쪽의) 태도에 격한 모습을 보인 적도 있었다고 한다. 모국 이태리의 심각한 경제상황을 감안하면 Drahgi 총재의 태도는 이해가 된다.
Drahgi 총재가 Bundesbank의 동의를 필요로 하는 다른 또하나의 이유는 바로 이들이 국채 매입을 수행하려는 방식 때문이기도 하다. ECB는 향후에 이뤄질 수도 있는 이태리와 스페인의 국채매입을 ESM(유럽안정기금)과 같이, 역할을 분담해 수행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ESM은 발행시장(Primary Market)에서, 그리고 ECB는 유통시장(Secondary Market)에서 국채를 매입하려는 계획이다. ESM에 대해도 독일은 EU에서 가장 많이 출연을 했고 독일이 고개를 끄덕여 주지 않으면 ESM을 움직일 수 없으므로 Drahgi 총재의 입장에서 독일 측의 동의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독일의 완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유럽의 재정위기의 해결은 이제 결정적인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ECB로서는 설립 당시 기관에 주어진 법적인 과제에 충실하다가 유로화의 붕괴, 그리고 더불어서 당연히 기관 스스로가 해체되는 상황을 감수하는 것이 과연 바른 길인지 심각하게 고민해야 하는 시점이다. EU조약의 규정들이 이 정도로 심각한 경제적 국면에 대한 고려없이 생성된 것이라면, 동 규정에 충실하기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하고 ECB가 물가안정에만 매달리는 것은 과연 바람직한가?
미국이나 영국의 중앙은행과 정부, IMF 같은 쪽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ECB의 결정을 블로킹하고 있는 독일정부와 Bundesbank에 대해 나름의 역할을 촉구해 왔다. 케인즈학파의 경제학자 크루그만도 ECB의 적극적 역할을 촉구하고 있고 유로그룹(EU 각 국의 재무부장관들의 모임)의 의장 융커는 독일이 국내정치 때문에 유로와 EU경제를 희생시키고 있다고 비난하고 있다.
독일은 왜 ECB의 국채 매입이나 유로본드 발행 등에 대해 완강하게 반대하는가? 유로화가 붕괴돼도 좋다는 것인가?
유럽에 채권을 가진 미국과 영국, 재정위기의 스페인과 이태리가 독일에게 역할을 촉구하는 것은 그들의 경제적 이해에 상응하는 것이다. 또한 그들의 요구에 부응하지 않는 독일도 자국의 경제적 이해를 우선으로 하기 때문일 것이다. 독일과 다른 나라들의 경제적 이해는 계속 평행선을 그릴 수밖에 없는가?
유로존 붕괴에 대한 우려는 독일내에서도 물론 크다. 유로존이 해체되는 경우 독일 경제가 그리스, 이태리, 스페인 등에 보유한 자산은 회수가 요원해진다. 금융권에 대한 채권과 국채뿐만 아니라 Bundesbank가 보유하는 이들 나라 중앙은행에 대한 Target 2 Position의 누적 미결제금액이 막대하다는 점에서 이러한 점이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우리 국내 관찰자의 판단에 비해 독일인들의 고민은 깊다.
독일 국내에서도 이해집단별로 국채매입과 관련한 ECB의 역할에 대해 의견이 다르다. 당연하겠지만 가장 적극적으로 ECB의 개입을 촉구하는 세력은 금융권이다. 수출을 중요시하는 기업과 노총도 이에 동조함으로써 경제문제에 있어서 같은 목소리를 내는 일이 거의 없는 금융계, 수출기업, 노총의 세 세력이 의견을 같이 하는 예외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토록 큰 경제 세력들이 ECB의 적극적 역할을 촉구함에도 불구하고 독일의 중소기업과 개인납세자들은 이에 대해 반대하고 있다. 소유와 경영이 분리되지 않은 독일 중소기업의 오너들은 대기업의 전문경영인들보다 훨씬 장기적인 안목에서 상황을 평가하는 경향이 있고 납세자 단체들과 함께 궁극적으로는 이러한 방식의 유로화 살리기가 이들의 경제적 부담으로 귀착되리라는 점을 잘 파악하고 있다. ECB의 국채 매입계획에 대해 가장 강력한 반대입장을 표명하는 것은 현재 이들이다. 정당별로 보면 민사당이나 녹색당 같은 좌파진보적 정당들은 ECB 계획에 동의하나 연정을 구성하는 기민당과 자민당 같은 보수우파 정당들은 반대의 입장에 서 있다.
독일내 의견이 반대 일색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독일 정부가 ECB의 국채매입계획에 아직 완강하게 반대하는 것은 독일 경제학계의 주류적 의견이 그쪽에 서 있기 때문일 것이다. 독일 경제학계의 주류의견이고 ECB의 국채 매입계획에 반대하는 경제학자들은 독일의 질서경제학적 전통(Ordoliberalism)에 서 있는 사람들이다.
독일의 고유한 역사학파적·제도주의적 전통을 이어받으며 경제정책의 현실을 중요시하는 이들 질서경제학파 학자들은 시장의 자율적 조정기능을 믿는 고전파 경제학과 다르고, 수요 창출을 위한 국가의 거시경제적 개입을 옹호하는 케인즈 경제학과도 다르다. 시장의 경쟁질서체계의 확립을 위한 국가의 미시적 개입(법제도적 개입)을 경제체계 유지의 핵심으로 보는 것이다.
이들이 ECB의 국채매입이나 유로본드 발행같은 유로화 구제책을 신뢰하지 못하는 중요한 이유는 이 방식에는 현재의 위기를 야기한 방만한 경제적 행위에 대해 적절한 경제적 책임을 부담시키고 향후에 그러한 행동이 재발되지 않도록 하는 제도적 장치가 없다는 점이다.
'바닥에 구멍이 나서 곧 침몰하려는 배안에서 이런 식의 사유를 하는 것이 적절한가…'라고 보는 것은 배를 보수하는 비용을 스스로 지불하지 않는 측이다. 보수비용을 지불하도록 강요되는 측에서는 다른 구멍이 또 생기지 않도록 하는 방어조처가 선행돼야 보수행위가 비로소 의미가 있지 않겠느냐고 항변한다. 시간이 허용된다면, 침몰 예정시간까지 아직 여유가 좀 있다면, 후자들의 논리를 무시하기는 어렵다. 문제는… 자본시장에서 시계추는 갑자기 빨리 회전할지도 모른다는 점이다.
시계추가 정상적인 속도로 회전한다면 EU에서는 독일의 동의를 구하기 위해서 이러한 제도적 장치에 대해 조금 더 생각해 보는 것이 필요할지 모른다. ECB가 이들 나라의 국채를 매입하느냐 안하느냐의 문제에 대하여만 논의할 것이 아니라 위기에 처한 국가들이 심각한 경제적 위기는 넘기게 해주더라도 그 구제책이 제공하는 국채 매각의 조건이나 규모도 적절하게 고통스러워서 중장기적으로는 재정건전화를 기하지 않을 수 없도록 유인기제가 작동하도록 하는 방법도 생각해 본다면 독일의 동의를 얻기가 더 쉬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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