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당선인과 인수위원 뿐만 아니라 국민들도 두가지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기로에서 깊은 고민에 빠져 있다. 원칙과 신뢰를 강조해 온 당선인에게 공약의 후퇴는 엄청난 정치적 손실이 될 가능성이 크다. 손익을 따지지 않더라도 당선인 자신의 양심이 이것을 용납하기 어려울 것이다. 국민들 중에도 공약을 그대로 밀고 나가야 한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반면에 공약의 대폭 수정 혹은 백지화와 재설정 등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주장도 만만치 않다. 국가의 경제적·재정적 능력이나 우리 경제의 장래를 생각할 때 공약은 처음부터 무리한 것이었고 따라서 공약 이행의 함정에 빠져 무리수를 두게 되면 국가적으로 커다란 타격을 입게 될 것이 거의 확실하다는 것이다.
이 문제를 어떻게 보고 어떤 선택을 해야 할 것인가?
첫째로 신뢰의 문제를 생각해 보자. 신뢰의 문제는 중요한 도덕성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사회시스템의 효율성에 미치는 영향이라는 관점에서도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따라서 신뢰의 회복, 특히 정치분야에서의 신뢰의 회복은 매우 커다란 가치를 부여할 수 있는 일임에 틀림이 없다. 특히 우리나라의 정치 현실을 생각할 때 신뢰의 회복은 가장 시급한 과제라고 말할 수밖에 없으면서도 바로 그 사실 때문에 그 과제에 도전하겠다는 박 당선인의 용기가 바위에 돌진하는 계란처럼 애처로워 보이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 신뢰의 회복은 말할 수 없이 귀중한 것이고 뒤로 물러설 자리가 전혀 없는 문제라는 것은 확실하다.
다음으로, 그렇다면 공약을 공약집에 있는 그대로 추진하는 것이 정말로 신뢰 회복의 길인가? 이 문제에 바르게 답하기 위해서는 다음의 두가지 사실에 관한 판단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먼저 박 당선인의 공약은 무엇이었나에 대한 정확한 판단이 필요하다. 공약집에 나열돼 있는 여러가지 구체적인 기술들이 공약이라고 정확하게 말할 수 있는가? 물론 그렇다고 주장할 수 있다. 그러나 대통령 선거에서 공약은, 다른 일반적인 약속과 마찬가지로,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대통령 후보와 지지자들과의 쌍방간의 약속이다. 따라서 공약집의 공약을 보고 유권자들이 그것을 어떻게 인식하고 어떤 생각에서 투표를 했는가가 중요하다고 말할 수 있다. 이번 선거처럼 의미있는 후보가 두명 뿐인 양강구도의 선거에서는 각 후보의 공약은 상대화 될 수밖에 없고 투표자들은 공약의 구체적 내용보다는 두 후보 공약의 상대적 위치를 보고 지지후보를 선택하게 된다. 그러므로 당선자와 지지자들 간의 약속은 공약집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한 지지 혹은 약속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양강구도의 선거에서는 공약이 중간으로 수렴한다는 사실은 이미 잘 알려진 것이다. 그렇다면 단순하게 좌우 일차원만 생각할 때 지지자의 대다수는 공약보다 오른쪽에 선호를 갖고 있으면서 차선으로 박 당선인을 선택한 것이지 그의 구체적인 공약 내용에 공감해서 지지를 보낸 것이라고 볼 수 없다. 따라서 이러한 상황에서 구체적인 공약의 내용에 집착하는 것은 정확한 약속의 이행이라고 보기 어렵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또 한 가지의 중요한 판단은 대통령으로서의 책무와 한 정치인으로서의 개인에 대한 품성의 평가 사이에서 어디에 무게를 둬야 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두가지가 같이 갈 경우라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어느 한쪽을 선택해야 한다. 지금은 무리한 약속이라도 그것을 잘 지키는 정치인 박근혜와 위기에 처한 나라와 국민을 최선의 길로 이끌어야 할 지도자 박근혜 대통령 사이에서 하나를 택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생각된다.
처음부터 공약이 구체적인 정책의 내용보다는 이념과 철학에 바탕을 둔 비전과 전략에 집중됐더라면, 그리고 구체적인 정책 대안의 제시가 필요할 경우 실현 가능성을 검증하고 여러 가지 부작용까지를 꼼꼼히 살펴서 포함시켰더라면 공약의 철저한 이행이 훨씬 더 의미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한 상황이 못 되게 한 것은 정치인들의 탓보다 유권자들의 탓이 더 크다고 생각한다. 무리한 공약을 밀어붙여서 심각한 어려움을 겪게 되면 투표자들이 좀 정신을 차릴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을 위해서 무리한 공약의 이행을 고집할 수는 없다.
임기 내내 이 나라의 믿음직한 대통령으로 남아있기 위해서는 합리적인 판단, 실수를 인정할 수 있는 솔직함과 겸손함, 상황의 급격한 변환에 대응할 수 있는 기민함과 유연함, 난관의 극복을 위해 국민들의 인내와 고통의 분담을 요구하고 설득할 수 있는 리더십 등 다양한 덕목이 필요하다. 새 정권이 공약집의 글자들에 묶여 대한민국호의 운항을 그르치는 일이 없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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