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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독하기 2024.09.21. (토)

내국세

[납세자의 날 학생세금문예작품전 입상작]-고등부 금상

나누는 기쁨-김진욱(대전 대성고등학교 2학년) 


'세무서'라는 단어쓰인 편지 모두감춰
납세의무를 충실히 이행하는 것은
삶을 살아가는데 의미부여해 주는 힘

나에게는 나쁜 습관이 있었다. 우리집 우편물의 일부를 내 책상 서랍 안에 몰래 숨기는 것. 우편물을 감추는데 기준은 보내는 사람의 주소에 '세무서'라는 단어가 쓰인 것이면 모조리 다 감추었다. 매번 몰래 우체통에서 꺼내 온 우편물을 넣기 위해 책상 서랍을 열 때면 쌓여만 가는 고지서들로 내 마음도 점점 더 무거워졌었다.

"어디 아프니?"

마지막으로 우편물을 책상 서랍에 숨기던 날, 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방으로 쏙들어가 한참동안 기척없는 아들이 걱정스러우셨는지 엄마는 내방에 들어오셨다. 나는 깜짝 놀라며 얼른 책상 서랍을 닫고 어설픈 웃음으로 엄마를 맞았다.

"아, 아니예요. 얼른 옷 갈아입고 나가서 TV보려고 했는데…. 얼른 갈아입고 나갈께요."

"에이, 녀석 싱겁긴…"

엄마는 나의 어설픔을 알아채지 못하고 나가셨다. 나는 "휴"하고 한숨을 쉬며 다시 서랍을 열고 수북히 쌓인 고지서들의 개수를 세며 꼼꼼히 살폈다. 최근 날짜의 봉투 위에는 '고지서 재중'이라는 빨간 글씨가 표지에 또렷하게 박혀 있었다.

내가 아버지의 사업세 고지서를 숨기기 시작한 것은 작년 가을부터였다. IMF가 터지고 중소기업이 연달아 파산할 때도 어렵지만 꿋꿋했던 아버지의 공장이 작년 봄부터는 전면 생산이 중단될 정도로 어려워졌다. 나에게 당당함을 가르쳐 주었던 '삼촌'과 다정한 '이모'가 되어주었던 공장 직원들을 아버지는 빠른 시일내에 다른 일자리를 알아 봐 주셨고, 그 뒤로 얼마전까지 아버지의 텅 빈 사무실에는 덩그러니 남겨진 낡은 소파위에 소복이 쌓인 먼지뿐이었다. 그 뒤로 우리 가족은 생계가 곤란하다는 말뜻을 온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아버지는 사업의 많은 부분을 정리하신 뒤에도 도움을 줄만한 거래처에 부탁을 해 보신다고 항상 열심이셨지만 일은 쉽지 않았다. 나는 늘 소신을 잃지 않는 아버지가 자랑스러웠고, 한없이 소심해지고 나약해져만 갔던 내 마음을 지탱해 주는 힘이 되어 주었다.

하지만 다달이 나오는 세금과 각종 납부 고지서들은 나의 힘이고 우상이었던 내 아버지의 어깨를 조금씩 움츠러 들게 만들어 나를 불안하게 하였다.

월말이면 어김없이 밀려들었던 각종 고지서들을 모아놓고 아버지와 엄마가 얼굴을 맞대고 한참을 엄한 침묵속에서, 숫자가 빼곡히 두드려진 계산기만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그 시간들이 얼마나 싫고 속상했던지….

그래서 한번 두번, 아버지의 사업 세금고지서만이라도 숨겨보자 시작한 일이 넉달 동안 계속 되어버렸다. 작년부터 계속된 여러 사업문제로 정신이 없었던 부모님은 세금고지서 한두개가 빠졌다는 것까지 알아채지 못하셨던 것이었다. 내가 고지서를 감춘지 두 달째가 넘어서자 붉은 글씨가 봉투에 박힌 고지서들이 열흘에 한번 꼴로 우편함에 자리잡고 있었고, 나는 학교에서나 집에서나 우편함속에 '지금도 혹시'라는 생각에 항상 불안했고, 조바심을 냈었다.

"다녀오셨어요?"

그날 오후, 씻고 숙제를 하고 엄마의 저녁 준비를 도와드리고 있던 차에 아버지가 들어오셨다.  신을 벗으시는 아버지의 입가에는 나를 향한 환한 미소가 지어져 있었지만, 아버지는 하루가 다르게 이마에 패어진 골이 깊어진다는 것을 내 앞에서 부인하시지 못하셨다. 오랜만에 아버지와 함께 저녁을 먹게 되었다.

늘 그랬듯 엄마는 여러 가지 하루 동안 집에서 있었던 소소하지만 유쾌하고 흥겨운 일들로 아버지의 마음을 부드럽게 녹여 줄 이야기들을 이끌어 나가셨고, 아버지와 나는 묵묵히 들으며 가끔씩 미소를 보였다. 그리고 밥상을 물릴 쯤 아버지는 어머니와 나에게 제안을 하셨다.

"저 오늘은 우리 후식이라도 좀 먹을까?"

늘 엄마가 제안했던 후식을 아버지가 먼저 제안함에 엄마는 놀란듯 과일을 준비하셨고, 나도 다시 자리에 앉았다. 아무래도 아버지가 무슨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으실 것만 같았다. 과일을 하나 두개 먹으며 조금씩 분위기가 익어 갈쯤 아버지는 말씀을 시작하셨다.

"당신이나 진욱이나 많이 힘들지? 하지만 우리 조금만 더 힘을 내 보자고…. 그건 그렇고 당신 알고 있었던 거야?"
"네? 뭐요?"
"세금 말야, 사업자 과세가 네 달째 밀려 있다고 세무서에서 휴대폰으로 전화가 왔더군."
"정말요? 아! 깜박 잊고 있었지요. 그런데 고지서도 안 왔는데요?"
"그래? 연체돼서 열흘에 한번 꼴로 독촉장을 발송했다고 하고, 주소도 확인했는데 맞던데….
그건 그렇고 지금 많이 힘들겠지만, 세금은 내야지. 네 달 연체돼서 목돈이 됐더라고…."

나는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무지 가슴이 떨리고 얼굴이 수시로 확확 당겨지는 것만 같아 그대로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세금을 미루다 보면 연체가 되어 더 큰 부담으로 돌아온다는 것을,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지만 조금이라도 회피해 보려 했던 내 부족하고 이기적이었던 마음이 너무나 부끄러웠다.

그날 밤 책상 서랍에 묵혀 두었던 고지서들을 차곡차곡 날짜별로 정리해서 아버지 서재 방문을 두드렸다.

"아버지"
"어, 지금까지 안 자고…. 뭐 할 말 있어?"
"그게…"

어떻게 시작하고 어떻게 맺어 나가야 할지 도무지 대책이 서질 않아 손에 꼭 쥔 세금고지서 뭉치를 아버지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아버지는 내 손을 주시하시더니 책상에 올려진 세금고지서 내역을 찬찬히 살피셨다. 침묵은 오래 이어졌고 나는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매번 돈 문제로 한숨 쉬는 아버지와 엄마 모습이 싫어서….
이번 달은 어려우니까, 다음 달에 생활이 좀 더 나아지면 두달치 내면 되겠지라는 생각으로 다음달도, 또 그 다음달도 우편물에 손을 댔어요. 정말 죄송해요, 아버지."

아버지는 가장 최근에 도착한 마지막 독촉장까지 꼼꼼히 살펴보시더니 늘 나의 잘못 앞에서 그랬듯 나를 향해 부드럽게 웃어 주셨다.

"아니다. 아니야…. 그럴 수 있어. 속 깊은 진욱이 모습을 보니까 되려, 아버지가 부끄러운 걸? 아버지는 말이다, 네 나이 때 할아버지를 아주 미워했었다.
항상 가난이란 이름으로만 돌아오는 그분의 떳떳함이 싫었지. 너도 알고 있겠지만 할아버지 할머니는 다른 집 품을 팔아 근근히 아버지와 세 고모와 두 삼촌을 키우셨어. 그럴 때 비슷한 처지의 친구집 부모님들은 품을 팔고 오는 날이면 몰래 이것 저것 챙겨와 친구들에게 좋은 옷을 입히기도 하고 맛난 것들도 먹이더구나. 하지만 네 할아버지는 절대 그런 법이 없으셨다. 어쩌다 할머니가 잔칫집에 남은 약과 몇 점이라도 몰래 챙겨오는 날이면 그 날은 할아버지가 역정을 내시며 술을 드시는 날이었다. 아버지는 그런 할아버지가 싫었어. 쓸데없는 자존심만 강하다고 여겼었지…. 하지만 네 할아버지의 마음을 아버지가 언제 이해하게 됐는지 아니?

너와 네 누나가 태어나고부터 였다. 좀 더 분명한 행동과 정직한 마음으로 너희들에게 바른 가르침으로 다가서야겠구나 항상 스스로를 반성하게 만들더구나. 일찍 돌아가셔서 진욱이나 엄마도 뵐 수 없었던 너희 할아버지도 아마 이런 마음이 아니셨나 생각된다. 가난하고 없어 세상의 아름다움을 많이 보여주지는 못해도 자식들에게 당신의 삶 자체로 가르침이 되고 싶었던 마음, 옳은 길만 자식들 눈에 열어 주고 싶었던 마음….

진욱아, 지금 아버지 마음이 그렇구나. 솔직히 아버지 지금 많이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많지만 항상 너나 서울에서 힘들게 대학 생활하는 누나에게 좋은 모습으로 좋은 가르침만 전하고 싶구나. 세금은 나라의 생활비이다. 지금 아버지가 생활비도 제대로 마련 못하니까 어떠니? 힘들고 갑갑하고 막막하지? 나라도 마찬가지야. 아버지가 어렵다고 자꾸 피하고 숨고 발뺌한다면 나라의 생활도 많이 어려워지는 거야. 그래서 말이다, 아까 네가 먼저 방에 들어가고 엄마와 한참 상의했었는데….

이 집을 정리하고 조금 작은 곳으로 옮겨 다시 한번 힘을 내고 싶은데, 괜찮겠니? 아버지는 네 의사에 따르마."

"그럼요, 전 괜찮아요."

나는 내 철없는 행동에 부끄러워 고개를 들 수 없었다. 그리고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다. 눈물을 흘리지 않기 위해 입을 꽉 다물고 침을 꼴깍 꼴깍 삼켜댔지만 콧물이 바닥으로 톡톡 떨어지는 것만은 막을 수 없었다.

"물론 지금에서 폐업신고를 해 버리고 쉽게 일을 정리하는 방법도 있다. 하지만 아버지는 폐업신고만은 하고 싶지 않구나. 어린 날 아버지가 네 할아버지에게서 여겼던 그런 고집이라 생각해도 좋다. 하지만 진욱아!

아버지가 오늘도 힘을 내고 내일도 힘을 낼 수 있게 하는 힘은, 아버지의 꿈이 현재진행형이라는 데서 오는 뿌듯함이었다. 지금 당장 많이 어렵다고 해서 폐업신고를 하고 모든 것을 정리해 버린다면 정말 아버지는 다시 시작할 힘이 나지 않을 것 같구나. 아버지는 꼭 다시 일어 설 것이고, 너나 네 누나 모두 예전처럼 아무런 이유없이도 밝게 웃을 수 있을 때까지 열심히 뛸 것이다.

참, 이건 말이다. 아버지가 내일이나 내일 모레쯤에 엄마에게 말하려 했는데, 늠름하고 자랑스러운 우리 장남 진욱이에게 먼저 말하고 싶은데? 아버지 일을 시작하게 됐다. 택시 운전을 하게 됐는데, 내일부터 출근할 것 같구나. 그래도 조금은 힘들겠지만 우리 가족 기본적으로 생활은 꾸려나갈 수 있도록 하고, 우리 다시 한번 힘을 내보자꾸나."

그렇게 아버지와 내가 진지한 대화를 나눈 얼마후 우리는 이사를 했다. 집의 평수는 반으로 줄어들었지만 가족들 마음에 싹튼 평화로움과 행복은 두배로 부풀어 있었다. 요즘 아버지는 영업용 택시를 이제는 익숙하게 운행하시며 우리 가족의 꿈과 행복을 위해 힘차게 달리고 희망과 열정을 곳곳에 실어 나르고 계신다.

보통 세금이라 하면 사람들은 모두 골치 아프고 버거운 존재로만 생각한다. 세상에 공기가 없으면 살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공기의 중요함을 깨닫지 못하듯, 우리 삶속에는 '나라'라는 울타리가 곳곳에 이룩해 놓은 '값진 부분'들을 인식하지 못하고 살고 있는 것 같다. 가정에서 생활비가 없으면 생활을 꾸려 나갈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국민들이 세금을 내지 않고 나만 잘 살려고 하는 이기적인 삶을 영위하려 한다면 나라를 지키고 사회질서를 유지하는 기본적인 일들은 물론, 경제 발전과 국민의 복지향상을 위해 노력하는 일들 역시 보장할 수 없을 것이다.

언젠가 읽은 책의 한 소절이 생각난다. 나눔은 돈을 많이 번 다음에, 성공한 다음에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 나눔은 여유가 있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가난과 부족함을 나누기 위해 하는 거라는 것.

지금 나는 가난하고 힘이 없어서 나눌 것이 없는 게 아니라 사실은 나누려는 마음이 가난하고 함께 하려는 소망이 결핍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세금도 '나눔'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지금 여유가 없으니까, 지금은 힘드니까 되도록 피하고 발뺌하고 봐야 하는 존재가 아니라, 자신에게 주어진 몫을 충실히 이행하는 것이 함께 사는 사회에 가장 기본적으로 지켜져야 할 덕목이라고 생각한다. 납세의 의무를 충실히 이행한다는 것은 자신의 삶에 충실하고 있다는 것, 더 나아가 삶을 살아가는데 의미를 부여해 주는 힘이 되지 않을까?

다달이 세금을 내는 것만으로도 당신의 꿈이 '현재진행형'임에 뿌듯함을 느끼며 삶의 커다란 활력이 된다고 하시는 바로, 우리 아버지처럼 말이다.

마지막으로 아직까지도 세금을 되도록 피하고 싶고 부정적인 존재로만 여기고 있는 사람들에게 지금 당장 주위를 둘러보라고 말하고 싶다. 내가 낸 세금으로 인해 신호등이 켜지고 어려운 이웃들에게 한끼의 식사가 돌아가고 나와 내 이웃의 편안함을 위해 새로운 도로가 닦아지고 있다는 것을….

가장 기본적인 나눔, 납세의 의무를 통해 우리 국민 모두가 진정한 나눔의 기쁨을 맛볼 수 있는 아름답고 밝은 사회가 하루 빨리 이뤄질 수 있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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