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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독하기 2024.09.21.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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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마당]隨筆-분홍빛 내의 한 벌



차가운 바람이 옷깃을 여미게 하는 겨울이 오면, 나는 장롱 속에 넣어 둔 따뜻한 분홍빛 내의를 꺼내 만져 보곤 한다. 차가운 바람을 밀쳐내기 위한 내의가 아니라 부드러운 감촉의 분홍빛 내의 속에 담긴 교장선생님의 고귀한 사랑이 그립기 때문이다.

아마 '91년의 가을이 깊어가는 어느 날로 기억된다. 그 때 나는 민원실에 근무하고 있었다. 민원실 창구에는 항상 민원인으로 북적되고, 하루가 언제 가는지도 모를 정도로 바쁜 편이었다. 그 날도 많은 민원업무를 처리한 후, 잠시 한숨을 돌리면서 민원인이 오는지 출입구쪽으로 시선을 향하고 있었는데, 그 때 출입구 문을 열면서 자그마하고 단아한 몸매의 여자분이 들어서고 있었다.

왠지 낯이 익어 자세히 쳐다보니 `아니! 고등학교 때의 교장선생님이 아니신가!' 나는 반가운 마음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선생님께로 다가가 “교장선생님 아니십니까? 무슨 일로 오셨읍니까?”하고 반갑게 인사를 하자 선생님께서 눈이 휘둥그레지면서 “자네 나를 아는가?”라고 놀라며 대답했다.

“네, 선생님 저는 ○○고등학교 제22회 졸업생입니다.”

“아! 그래 나를 알아보니 무척 반갑네. 제자가 여기 있으니 마음이 편안해지는구먼. 내가 궁금한 게 있어 왔네.”

“네, 여기 앉으십시오 교장선생님”하고 내용을 들어보니 주택 양도와 관련한 양도소득세의 내용이었다. 교장선생님에게 충분히 설명을 드리니, 부족한 서류를 구비한 후 다시 찾아오겠다는 말을 남기시고 떠나가셨다.

교장선생님이 돌아가신 후 잠시동안 15년이 흐른 여고시절의 생각들이 찾아와 어렴풋이 회상에 잠겼다. `선생님들간에는 호랑이같은 시어머니인 교장선생님이셨고, 학생들을 위해서 학교의 정원에 봄이면 개나리, 가을이면 국화가 만발하는 꽃들의 축제를 준비하시느라 늘 바쁘시던 열정적인 교장선생님' 그러나 지금은 하얗게 백발이 된 교장선생님의 모습에서 세월의 무상함은 물론, 오히려 안타까운 연민의 정이 앞선다.

며칠이 지난 후 교장선생님께서 서류를 구비하시어 다시 찾아오셨고, 이것이 인연이 되어 비록 전화상이지만 나는 교장선생님께 자주 안부를 여쭐 수 있게 되었다. 여고시절에 가까이하기 어려웠던 교장선생님은 어느샌가 나의 마음 한구석에 자리잡아 나의 삶의 위로자이며 안내자가 되셨다. 그 때 교장선생님께서 나에게 말씀해 주신 `사람을 대할 때 가장 편안하게 하는 모습은 웃는 얼굴이며, 언제나 웃는 얼굴은 가슴에 조각하는 연습을 하여라. 그러면 어느날 향기로운 삶의 냄새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라는 말씀은 아직까지 나의 뇌리 속에 소중한 삶의 지혜로 남아있다.

그러던 어느 날 누군가로부터 전화가 왔다.

교장선생님의 며느리되는 분이었는데, 교장선생님께서 근래 몰랐던 세무관계일을 제자를 통해 잘 알게 되어 매우 고마워하셨다는 말씀을 자주 하시어 며느리분도 나에 대해 알게 되었고, 모레쯤 제자에게 다시 문의할 것이 있다며 가져갈 서류를 챙겨두시고는, 평소 혈압이 높으셨는데 어제 갑자기 쓰러져 병원에 입원을 하셨다는 것이다.

정신없이 병원으로 달려가 교장선생님을 찾았다. 한 층이나 왜소해진 선생님의 모습을 바라보니 나도 모르게 눈가에 이슬이 고였다. 교장선생님께서 나의 손을 잡으시면서 무슨 말을 하시는데 잘 알아들을 수 없어 당황해하니 옆에 서있던 아들이 “제자 ○○○ 왔구나. 그래 고마웠다. 바쁜데 여기는 왜 왔니. 어서 가거라.” 라고 통역을 했다.

며칠 후 선생님은 끝내 눈을 감으시고 말았다.

그 후 얼마 안 되어 교장선생님의 며느리가 민원실을 찾아와 내 앞에 조그만 꾸러미를 내밀면서 교장선생님이 제자에게 주고자 생전에 사 두었던 내의 한 벌이라며 돌아가실 때 이 내의를 꼭 제자에게 전하라는 말을 남기셨다는 것이다. 교장선생님의 마음을 받아 달라며 며느리가 나의 손을 꼭 잡을 때 나는 그만 할 말을 잊고 말았다.

모든 일이란 아주 사소한 것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아무리 작은 일에도 정성이 담겨야 된다는 것을, 모든 이가 들어올 수 있는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살아야 된다는 것을, 작은 일에도 감사의 마음을 가질 수 있는 소중한 것을 가르쳐 주신 교장선생님의 따뜻한 사랑이 두 줄기 눈물되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교장선생님은 가시고 없지만 귀한 말씀은 오래도록 내 가슴에 남아 실천하고자 노력하며 다시한번 독백해 본다.

`언제나 웃는 얼굴을 가슴에 조각하자. 그리고 삶의 향기를 함께 나누자'

차가운 바람이 옷깃을 여미게 하는 겨울이 오면, 여느 때처럼 분홍빛 내의를 만져보며 눈시울을 붉히곤 한다.
   
-오 임 숙(통영署 납세자보호담당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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