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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독하기 2024.09.18.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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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마당 - 隨筆] 친구이야기 20 (만년필)-上

이운우 경주署


가을이 점점 깊어만 간다.

바람이 불어오는 창너머 풍경은 온통 가을빛이다.

침대에 누워 내려다 보이는 왼쪽의 봉황대와 고목 물푸레나무도 푸른색에서 점점 갈색으로 변해가고 그 오른쪽에는 성결교회 종탑이 하늘을 배경으로 더욱 높게 펼쳐져 있다.

병실의 가을은 언제 어떻게 왔다가 가는지 모른다. 점점 높아져 가는 코발트색 하늘과 봉황대의 잔디나 물푸레나무의 빛깔로 계절을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벌써 한달 가량 꼼짝없이 누워서 '시간의 흐름', '존재의 이유', '삶과 죽음의 가치' 이런 등등의 의문과 갈등을 삼키며 17살 젊음을 둥지속의 새 마냥 지루하게 흘려보내고 있었다.
한달전의 일이었다.

석은 새벽 4시에 일어나 조간신문을 다 돌리고 집으로 가려는데, 신문이 2부나 남았다. 신문 배달은 부수를 정확히 세는 것이 배달하는 것 못지 않게 중요하다. 분명히 200부를 세어서 빠짐없이 다 돌렸으면 한 부가 남아야 되는데, 2부가 남다니 무언가 잘못됐다. 한 집을 빠뜨렸거나, 아니면 한부를 더 세어서 갖고 왔거나 둘 중에 하나다. 의심이 가는 곳에 몇군데 다시 둘러봤다. 아침신문을 기다리는 독자를 생각하면 어떻게 하든지 빠진 곳을 찾아내어 배달해 주어야지…. 그리고 빨리 아침밥 먹고 학교에 등교해야 되고, 마음이 급했다.

사정동 공고 앞을 지나 왼쪽으로 급히 자전거 핸들을 돌리는데, 무언가 거대한 산 같은 것에 탁 부딪혀 공중으로 부웅 뜨는 기분이 들었다.

'꿈속일까?'

그얘가 부서진 기-타를 들고 울고 있었다. 아픔과 고통으로 다시 정신을 잃었다. 청소차량과의 충돌로 머리를 다치고 갈비뼈가 몇개 부러지는 중상을 당하는 사고로 일주일만에 의식을 되찾았단다. 그동안 생사의 길목을 몇번이나 드나들었고, 목숨을 건진 것만 해도 천만다행이라고들 술렁거렸다.

얼마전 시내에 갔다가 악기점 앞을 지나치는데 지난달 그애의 것과 똑같은 모양의 세고비아 기-타가 눈에 띄어 가격을 물어보니 4만원이라는데 잘만하면 3만5천원에 깎아줄 수 있다고 했다. '저것을 살 수 있는 방법이 무얼까?' 며칠간의 궁리 끝에 3만5천원을 모으기 위한 가장 쉬운 방법은 신문배달이었다. 한달에 3천원의 월급을 준다고 하니 눈 딱 감고 1년만 새벽잠을 포기하면 내년 크리스마스 때 그애에게 좋은 선물이 되리라. 두달치 월급인 6천원을 모으고는 그만 사고가 났던 것이었다. 

병실에서의 하루일과는 투약되는 약과 링겔주사와의 전쟁이 아니라 지겨움과 두려움을 어떻게 이기느냐의 싸움이었다. 지루함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사색(실지로는 '죽음'이라는 두려움이겠지만)과 독서뿐이었다.

마침 병실에 돌아다니는 겉표지가 달아난 '세계단편문학전집'을 짬짬이 보고 있던 중에 눈이 번쩍 뜨이는 소설이 있었다.

오헨리의 '마지막 잎새'였다. 가난한 화가 수우와 존시 아가씨, 그리고 30년 간이나 그림을 그리지 못한 노화가 벨만 아저씨가 그 주인공이었다. 폐렴으로 죽어 가는 존시는 창 밖의 담쟁이와 마지막을 같이 하려는데, 어쩌면 석의 처지와 비슷한 생각이 들었다. 노화가는 그 이야기를 듣고 일생의 대 걸작품으로 밤새 비를 맞아가며 담벽에 마지막 잎새를 그려놓고 자신은 존시를 대신해 말없이 저 세상으로 가고, 마지막 잎새는 비바람에도 끄떡없이 존재하고…. 남을 위해 자기의 목숨까지 희생할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몇이나 될까. 이렇게 아름다운 이야기도 다 있었던가! 석의 아픈 가슴이 감동으로 인해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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